로버트 피어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로버트 피어리는 미국의 탐험가로, 특히 북극 탐험으로 유명하다. 1856년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나 메인주에서 성장했으며, 토목 공학을 전공했다. 1880년대부터 북극 탐험을 시작하여 그린란드를 여러 차례 탐험했고, 1898년에는 북극점 도달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1909년 4월 6일, 매튜 헨슨 등과 함께 북극점에 도달했다고 주장했으나, 그의 주장에 대한 논란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피어리는 이누이트와의 관계, 케이프 요크 운석 반출 등으로 비판을 받았으며, 해군 소장으로 예편 후 다양한 사회 활동을 펼치다 1920년 사망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여러 지명과 기념물이 세워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미국 해군 소장 - 리처드 에벌린 버드
리처드 에벌린 버드는 미국의 해군 군인이자 극지 탐험가, 항공 개척자로서 북극과 남극 탐험을 주도하며 북극점과 남극점 상공 비행에 성공하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많은 훈장을 받았다. - 미국 해군 소장 - 래피얼 셈스
래피얼 셈스는 미국-멕시코 전쟁과 남북 전쟁에 참전하고 남부 연합 해군에서 CSS 섬터와 CSS 앨라배마를 지휘하며 상선을 약탈했으며, 앨라배마 격침 이후 변호사, 신문 편집장, 대학교수로 활동하다가 1877년에 사망했다. - 포틀랜드 (메인주) 출신 - 린다 래빈
린다 라빈은 브로드웨이와 텔레비전 드라마 《앨리스》에서 활약하며 토니상과 골든 글로브상을 수상한 미국의 배우이자 가수이며, 카바레 가수 활동과 커뮤니티 극장 설립 등 사회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 포틀랜드 (메인주) 출신 - 니콜 메인스
니콜 메인스는 미국의 배우, 작가, 옹호자이며, 텔레비전 최초의 트랜스젠더 슈퍼히어로를 연기하고, 트랜스젠더 학생의 권리를 옹호하며, LGBT 권익 신장을 위해 활동한다. - 미국의 장군 - 윌리엄 헨리 해리슨
미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인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미영 전쟁 영웅으로, 하원의원, 상원의원, 인디애나 준주 지사를 역임한 후 제9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취임 한 달 만에 폐렴으로 사망하여 최단 기간 재임 대통령으로 기록되었고, 그의 죽음은 미국 대통령직 승계에 대한 헌법적 논쟁을 야기했다. - 미국의 장군 - 앤드루 잭슨
앤드루 잭슨은 미국의 제7대 대통령으로서, 군사적 성공을 통해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강력한 대통령 권한 행사, 제2 미국 은행 폐지, 인디언 강제 이주 정책 추진 등 잭슨 민주주의 시대를 열었으나 인종차별적 정책에 대한 논란 또한 존재하는 인물이다.
로버트 피어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인물 정보 | |
![]() | |
본명 | 로버트 에드윈 피어리 |
출생 | 1856년 5월 6일 |
출생지 | 펜실베이니아주크레슨 |
사망 | 1920년 2월 20일 |
사망지 | 워싱턴 D.C. |
묻힌 곳 | 알링턴 국립묘지 |
학력 | 보도인 대학교 |
직업 | 탐험가 |
배우자 | 조세핀 디비치(1888년 8월 11일 결혼) |
자녀 | 4명 |
수상 | 컬럼 지리학 메달 찰스 P. 데일리 메달 허바드 메달 |
군사 경력 | |
소속 | 미국 |
복무 기간 | 1881년–1911년 |
최종 계급 | 해군 소장 |
소속 부대 | 시설 공병대 |
주요 업적 | |
업적 | 매슈 헨슨과 함께 지리적 북극점에 도달했다고 주장 |
2. 초기 생애 및 경력
1878년부터 1879년까지 피어리는 프라이버그에서 거주하며 조키 캡 록 정상에서 프로필 측량을 수행했다. 이 360도 측량은 정상에서 보이는 주요 언덕과 산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피어리 사후, 그의 어릴 적 친구 알프레드 E. 버튼의 제안으로 이 측량 기록은 청동 기념비로 제작되어 화강암 받침 위에 세워졌으며, 1938년 피어리 가문이 고인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4]
대학 졸업 후, 피어리는 워싱턴 D.C.의 미국 해안 측량국 사무실에서 제도사로 일했다. 이후 미국 해군에 지원하여 1881년 10월 26일 토목 공병대 중위로 임관했다.[1] 1884년부터 1885년까지는 니카라과 운하 건설 계획을 위한 측량 작업에 참여하여 처음에는 보조 엔지니어로, 나중에는 책임 엔지니어로 활동했다. 1885년에 작성된 그의 일기에는 해군 복무 중 북극점에 최초로 도달하겠다는 결심이 나타나 있다.[3]
1886년 4월, 피어리는 미국 과학 아카데미에 그린란드 빙상 횡단에 관한 두 가지 방법을 제안하는 논문을 제출했다. 첫 번째 방법은 서해안에서 출발하여 동해안까지 약 약 643.74km를 횡단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이자 더 어려운 방법은 배핀만 북쪽의 웨일 사운드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나아가 그린란드가 섬인지 아니면 북극까지 이어지는 대륙인지 확인하는 것이었다.[5] 피어리는 이후 1901년 1월 5일 소령으로, 1902년 4월 6일에는 중령으로 진급했다.[1]
2. 1. 출생 및 교육

로버트 에드윈 피어리는 1856년 5월 6일 펜실베이니아주 크레슨에서 찰스 N. 피어리와 메리 P. 피어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1859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피어리와 그의 어머니는 메인주 포틀랜드로 이사했다.[1] 피어리는 포틀랜드 고등학교(메인)에 다녔고 1873년에 졸업했다.
이후 피어리는 북쪽으로 약 약 57.94km 떨어진 보든 칼리지에 입학하여 델타 카파 엡실론 동아리와 파이 베타 카파 명예 학회의 회원이 되었다.[2] 그는 대학 시절 조정 팀에서도 활동했으며,[2] 1877년 토목 공학 학위를 받으며 졸업했다.[2][3]
3. 북극 탐험
로버트 피어리는 1886년 그린란드 횡단을 시도하며 첫 북극 탐험을 시작했다.[3] 그는 이후 여러 차례 그린란드와 북극 지역 탐험에 나섰으며, 이 과정에서 이누이트의 생존 기술을 배우고 활용하는 등 이전 탐험가들과는 다른 접근 방식을 보였다. 특히 개썰매 운용, 보급품 사전 비축, 지원팀 활용 등을 체계화한 이른바 "피어리 시스템"은 그의 탐험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탐험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탐험가 매튜 헨슨이 거의 모든 여정에 동행하며 핵심적인 조력자 역할을 수행했다.[5][6]
피어리는 1891년~1892년 그린란드 탐험을 통해 그린란드가 섬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등 지리적 발견에 기여했으며[5], 1898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북극점 도달에 도전했다. 첫 시도에서는 동상으로 발가락을 잃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69], 포기하지 않고 탐험을 계속했다. 1898-1902년 탐험에서는 그린란드 북단 케이프 모리스 제섭을 발견하고 당시 서반구 최북단 도달 기록을 세웠으며[13], 1905-1906년 탐험에서는 ''루즈벨트''호를 이용해 북위 87°06' 지점에 도달하여 최북단 세계 기록을 경신했다고 주장했으나, 이 기록은 후일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15] 또한 이 시기 존재하지 않는 "크로커 랜드"를 발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7]
마침내 1909년 4월 6일, 피어리는 매튜 헨슨과 4명의 이누이트 대원과 함께 북극점에 도달했다고 선언했다.[18][19] 그러나 그의 귀환 직후, 과거 동료였던 프레더릭 A. 쿡이 먼저 북극점에 도달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우선권 논쟁이 벌어졌다.[22] 비록 쿡의 주장은 증거 부족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피어리의 북극점 도달 주장 역시 기록의 불확실성, 비현실적인 이동 속도, 독립적인 검증 부족 등의 이유로 오늘날까지도 지속적인 의문과 논쟁에 휩싸여 있다.[23][2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여러 차례에 걸친 탐험은 북극 지역에 대한 지리적 지식을 넓히고 극한지 탐험 기술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으며, 왕립지리학회 등으로부터 여러 차례 공로를 인정받았다.[12][69]
3. 1. 초기 그린란드 탐험 (1886년, 1891-1892년)
피어리는 1886년, 개썰매를 이용하여 그린란드를 횡단하려는 계획으로 첫 북극 탐험에 나섰다.[3] 해군에서 6개월 휴가를 얻고 어머니에게 500USD를 지원받아 탐험 물품을 구매하고 고래잡이 배를 타고 그린란드로 향했다. 1886년 6월 6일 고드하븐에 도착한[3] 피어리는 혼자 탐험하려 했으나, 젊은 덴마크 관리인 크리스티안 마이가르드의 설득으로 함께 출발했다. 그들은 동쪽으로 약 약 160.93km 이동했지만 식량이 부족해 돌아왔다. 이는 당시 그린란드 빙상 탐험 중 두 번째로 먼 거리였으며, 피어리는 이 경험을 통해 장거리 얼음 트레킹에 필요한 지식을 얻고 귀국했다.[5]
1887년 11월, 워싱턴 D.C.에서 해군으로 근무하던 피어리는 니카라과 운하 건설 경로 조사를 위해 파견되었다. 그는 현지에서 필요한 햇볕 가리개를 사러 간 가게에서 21세의 흑인 점원 매튜 헨슨을 만났다. 헨슨이 선실 소년으로 6년간 항해한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피어리는 즉시 그를 개인 집사로 고용했다.[6] 니카라과 정글에서 임무를 수행하며 피어리는 헨슨에게 자신의 북극 탐험 꿈을 이야기했고, 헨슨은 이후 피어리의 모든 북극 탐험에 동행하며 그의 현장 조수이자 "선두"로서 탐험대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5][6]
1891년~1892년 그린란드 탐험에서 피어리는 그린란드가 북극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육지인지 확인하기 위해 더 북쪽으로 향하는 경로를 택했다. 이 탐험은 미국 지리학회, 필라델피아 자연 과학 아카데미(현재 드렉셀 대학교 자연 과학 아카데미), 브루클린 예술 과학 연구소 등 여러 단체의 후원을 받았다. 탐험대에는 피어리의 핵심 조수인 헨슨을 비롯해 외과 의사 프레더릭 A. 쿡, 노르웨이 출신 스키 선수이자 민족학자 에이빈 아스트루프, 조류 전문가 겸 명사수 랭던 깁슨, 기상학자 겸 광물학자 존 M. 베르호에프가 참여했다. 피어리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았음에도 아내 조세핀 피어리를 식단 관리사로 탐험에 동행시켰는데, 이는 당시 언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5][7]

1891년 6월 6일, 탐험대는 물개 사냥선 SS ''Kite''호를 타고 뉴욕 브루클린을 출발했다. 그러나 7월, 배가 유빙을 헤치고 나아가던 중 쇠로 된 방향타가 갑자기 돌아가면서 피어리의 다리 아랫부분 뼈 두 개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5][7][8] 피어리는 매코믹 피오르드 입구의 레드 클리프 캠프에 내려져 다음 6개월 동안 치료와 회복에 전념했다. 아내 조세핀이 그와 함께 머물렀고, 깁슨, 쿡, 베르호에프, 아스트루프는 보트를 타고 주변 지역을 탐사하며 이누이트와 교류했다.[5]

피어리는 이전 탐험가들과 달리 이누이트의 생존 기술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활용했다. 그는 이글루 짓는 법을 익히고 이누이트 방식의 실용적인 모피 옷을 착용하여 보온성을 높였으며, 이를 통해 무거운 텐트와 침낭 없이도 행군할 수 있었다. 또한 이누이트를 사냥꾼과 개 운전사로 고용하고, 보급품을 미리 비축하는 방식의 "피어리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누이트들은 미국인 탐험대에 호기심을 갖고 레드 클리프를 방문했다. 조세핀 피어리는 이누이트의 생활 방식(체취, 벼룩, 음식 등)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그들을 관찰하고 경험을 일기에 기록했다.[7][8] 1891년 9월, 피어리 일행은 보급품 비축을 위해 개 썰매를 타고 내륙 빙상으로 들어갔으나 레드 클리프에서 약 48.28km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5]
1892년 2월, 다리 부상에서 회복한 피어리는 4월에 조세핀, 이누이트 썰매꾼과 함께 보급품 구매를 위해 인근 마을을 다녀왔다. 5월 3일, 마침내 피어리는 헨슨, 깁슨, 쿡, 아스트루프와 함께 본격적인 탐험을 시작했다. 약 241.40km를 이동한 후, 피어리는 아스트루프와 단둘이 계속 나아갔다. 그들은 1000m 높이의 네이비 절벽에서 인디펜던스 피오르드를 발견했고, 이를 통해 그린란드가 섬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총 약 2011.67km를 이동한 그들은 8월 6일 레드 클리프 기지로 무사히 귀환했다.[5]
3. 2. 북극점 도달 시도 (1898-1902년, 1905-1906년)

피어리는 1898년부터 1902년까지 이어진 탐험에서 엘스미어 섬에 버려져 있던 포트 콩거를 기지로 활용했다. 이 탐험 중 그는 1899년 엘스미어 섬 서쪽에서 "제섭 랜드"를 육안으로 발견했다고 주장했다.[11] 피어리는 이 섬(악셀 하이베르그 섬)을 노르웨이 탐험가 오토 스베르드루프가 발견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보았다고 주장했지만, 이 주장은 탐험 학회와 역사학자들에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지리학회와 런던 왕립 지리학회는 피어리의 끈기, 미지의 지역 지도 제작 능력, 그리고 1900년 그린란드 북단 케이프 모리스 제섭 발견 등의 공로를 인정했다. 피어리는 또한 1898년 첫 북극점 도전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동상으로 발가락 8개를 잃었으며, 1902년에는 캐나다 엘스미어 섬 북쪽에서 서반구의 "최북단" 지점에 도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1901년 미국 해군 중령으로, 1902년에는 사령관으로 진급했다.[13]

피어리의 다음 탐험(1905-1906년)은 피어리 북극 클럽의 지원을 받았다. 특히 은행가 찰스 크로커의 아들 조지 크로커가 5만달러, 모리스 K. 제섭이 2.5만달러를 기부하여 새로운 탐험선 '루즈벨트' 호를 마련할 수 있었다.[14] '루즈벨트' 호는 그린란드와 엘스미어 섬 사이의 얼음을 뚫고 항해하여 당시 배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북쪽 지점(미국 반구 기준)에 도달했다. 1906년, 피어리는 북위 83도 부근의 엘스미어 섬 북단에서 자신이 개발한 "피어리 시스템" 개 썰매를 이용하여 북극해의 거친 해빙을 가로지르는 북극점 탐험을 시작했다. 탐험대는 하루에 약 16.09km도 채 나아가지 못했고, 도중에 폭풍을 만나 흩어지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피어리는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자신이 도달한 지점보다 북쪽의 상황을 확인해 줄 숙련된 동료 없이 고립되었다. 그는 육지로 돌아가는 길의 얼음 상태마저 불확실해지자, 녹아내리는 얼음 위에서 필사적으로 이동하여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4월 20일, 그는 북위 86°30' 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위도는 피어리 자신이 공개한 것이 아니라, 훗날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의 의뢰로 월리 허버트가 피어리의 1906년 4월 일기 타자본을 분석하여 밝혀낸 것이다. 그런데 이 타자본은 피어리가 "최북단"에 도달했다고 주장한 4월 21일 바로 전날 기록에서 갑자기 끊겨 있으며, 해당 시기의 원본 일기는 피어리의 탐험 기록 중 유일하게 사라진 상태이다.[15] 피어리는 다음 날인 4월 21일에 북위 87°06' 지점에 도달하여 최북단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고 주장했으며, 그곳에서 야영 없이 곧장 남쪽의 북위 86°30' 지점으로 돌아왔다고 보고했다. 이는 돌아오는 길에 전혀 쉬지 않고 직선으로 이동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최소 72nmi를 이동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매우 어려운 일로 여겨진다.
1906년 5월 '루즈벨트' 호로 복귀한 피어리는 6월에 엘스미어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힘겨운 여정을 시작했다. 그는 케이프 콜게이트를 발견했으며, 1907년에 출판한 책에서[16] 1906년 6월 24일 그 봉우리에서 북서쪽 먼 곳에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육지, "크로커 랜드"를 보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중에 발견된 당시 그의 일기에는 "육지가 보이지 않는다"라고 적혀 있었다.[17] 1906년 12월 15일, 미국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는 피어리의 1905–1906년 탐험과 그가 주장한 "최북단" 도달을 인정하여 협회의 최고 영예인 허바드 메달을 수여했다. 그러나 다른 주요 전문 지리학회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1914년 도널드 백스터 맥밀란과 피츠휴 그린이 이끄는 탐험대는 크로커 랜드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3. 3. 북극점 도달 주장 (1908-1909년)

1908년 7월 6일, 피어리는 자신의 8번째 북극 탐험을 위해 ''로즈벨트''호를 타고 뉴욕을 출발했다. 탐험대는 피어리를 포함한 22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주요 대원으로는 ''로즈벨트''호의 선장 로버트 바틀렛, 외과 의사 J.W. 굿셀 박사, 로스 길모어 마빈, 도널드 벡스터 맥밀란, 조지 보럽, 그리고 매튜 헨슨 등이 있었다. 케이프 요크(그린란드)에서 여러 이누이트와 그 가족들을 합류시킨 후, 탐험대는 엘즈미어 섬의 케이프 셰리던 근처에서 겨울을 보냈다.
탐험대는 이른바 "피어리 시스템"이라 불리는 방식으로 썰매 여정을 진행했다. 이는 여러 지원팀이 순차적으로 전진하며 보급 기지를 만들고 길을 닦은 뒤 복귀하고, 최종 공격조는 이들의 지원을 받아 최소한의 인원으로 목표 지점에 도달하는 방식이었다. 1909년 2월 15일, 바틀렛이 이끄는 선발대가 케이프 컬럼비아를 향해 출발했고, 그 뒤를 이어 5개의 전진 부대가 차례로 나섰다. 피어리 자신은 2월 22일에 출발했으며, 총 7명의 미국인 탐험대원, 19명의 이누이트, 140마리의 개, 28대의 썰매가 동원되었다.[18]
탐험대가 북쪽으로 나아가면서 지원팀들은 계획에 따라 차례로 복귀했다.
- 3월 14일: 굿셀 박사의 첫 번째 지원팀이 북위 84°29' 지점에서 복귀.
- 3월 20일: 보럽의 세 번째 지원팀이 북위 85°23' 지점에서 복귀.
- 3월 26일: 마빈의 팀이 북위 86°38' 지점에서 복귀. (마빈은 복귀 도중 사망)
- 4월 1일: 바틀렛의 마지막 지원팀이 북위 87°46'49" 지점에서 복귀.[18][19]
바틀렛이 돌아간 후, 피어리는 매튜 헨슨과 이누이트 대원 오타(Ootah), 에기깅와(Egingwah), 세글로(Seegloo), 오크(Ooqueah) 등 총 6명으로 최종 팀을 구성하여 5대의 썰매와 40마리의 개를 이끌고 북극점을 향한 마지막 여정을 시작했다. 이들 중 항해술을 이용한 위치 측정 능력을 갖춘 사람은 피어리뿐이었다.[18][19]
1909년 4월 6일, 피어리는 자신이 북극점으로부터 약 약 4.83km 떨어진 지점이라고 판단한 곳에 '캠프 제섭'을 설치했다.[20] 그는 육분의와 인공 수평선을 이용하여 태양의 고도를 측정했고, 이를 통해 캠프의 위치가 북위 89°57'라고 계산했다. 피어리는 여러 차례, 여러 방향에서 측정을 반복했으며, 이 과정에서 실제 북극점을 통과하거나 매우 근접했다고 주장했다.[18][19] 헨슨은 주변을 정찰한 후 피어리에게 "내가 세계의 꼭대기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것 같다"고 말했는데, 이는 피어리를 언짢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21]
4월 7일, 피어리 일행은 귀환길에 올라 4월 23일 케이프 컬럼비아에 도착했고, 4월 26일에는 ''로즈벨트''호로 돌아왔다. 다른 지원팀들도 순차적으로 배에 복귀했으며, 7월 18일 ''로즈벨트''호는 미국으로 출발했다.[18][19]
귀국 후 피어리는 과거 자신의 탐험대 동료였던 프레데릭 A. 쿡 박사가 이미 1908년에 북극점에 도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22] 이로 인해 피어리의 주장은 발표 직후부터 논란에 휩싸였으나,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와 미국 하원 해군 문제 소위원회는 피어리의 기록을 검토한 후 그가 북극점에 도달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22] 그러나 피어리의 북극점 도달 여부에 대한 논쟁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23][24]
3. 3. 1. 북극점 도달 주장에 대한 논란
로버트 피어리가 북극점에 도달했다는 주장은 발표 직후부터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의심받아 왔다.[23][49][22] 일부 극지 연구 역사가들은 피어리가 진심으로 자신이 북극점에 도달했다고 믿었다고 보지만[22], 의도적으로 업적을 과장했다는 비판도 꾸준히 제기된다.[23] 특히 피에르 베르통(2001)과 브루스 헨더슨(2005) 등은 피어리의 주장을 강하게 비판했다.
논란은 피어리가 귀환 직후, 과거 탐험 동료였던 프레데릭 A. 쿡 박사가 자신이 1년 전인 1908년 4월 21일에 먼저 북극점에 도달했다고 주장하면서 본격화되었다.[22] 조사위원회가 꾸려졌으나 쿡의 주장은 증거 부족으로 기각되었고, 그는 이후 사기죄로 수감되기까지 했다. 결국 피어리가 공식적인 최초 도달자로 인정받았지만, 이 과정에서 피어리가 쿡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증인을 매수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기도 했다. 다만, 현재 연구로는 쿡 역시 실제 북극점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까지만 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피어리의 주장에 대한 주요 의혹은 다음과 같다.
- 증거 검증 부족 및 후원 기관의 편향성: 피어리는 자신의 탐험 기록과 데이터를 중립적인 제3자나 국제기구, 혹은 다른 탐험가들에게 제출하여 검증받는 것을 거부했다.[22] 그의 주장은 탐험의 주요 후원자였던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NGS)의 자체 위원회가 기록을 간략히 검토한 후 1909년에 서둘러 공인해주었는데, 이는 쿡의 주장이 덴마크 전문가 패널에 의해 기각되기 불과 몇 주 전이었다.[22] NGS는 피어리의 기록에 대한 외부 접근을 오랫동안 제한했으며, 이는 객관적인 검증을 어렵게 만들었다.[22] 런던의 왕립 지리학회(RGS)는 1910년 피어리에게 특별 메달을 수여했지만, 이는 내부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으며[50], RGS는 NGS가 철저한 검증을 했을 것이라고 믿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미국 지리학회나 다른 스칸디나비아의 지리학회들은 피어리의 북극점 도달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 항해 능력 및 기록 부재: 피어리는 북극점으로 향하는 마지막 여정에 항법 능력을 갖춘 유일한 동료였던 로버트 바틀렛 선장을 돌려보냈다. 그와 동행한 매튜 헨슨과 4명의 이누이트 대원 중에는 피어리의 위도 및 경도 측정을 독립적으로 확인하거나 검증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51] 또한 피어리는 바틀렛과 헤어진 이후의 여정에서 경도 측정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았고, 위도 측정 기록 역시 결정적인 날짜(1909년 4월 6-7일)의 일기 원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극점에서 썼다고 주장한 유명한 문구 "마침내 극점에 도달하다!"(The Pole at last!!!eng)는 나중에 별도의 종이에 적어 일기장 사이에 끼워 넣은 것으로 밝혀졌다.[52]

- 비현실적인 이동 속도 및 거리: 바틀렛이 남쪽으로 돌아간 '캠프 바틀렛' 이후, 피어리 팀의 하루 평균 이동 속도는 이전보다 갑자기 두 배 이상 빨라졌고, 북극점에서 돌아올 때는 네 배까지 빨라졌다고 기록되었다. 이는 하루 평균 약 20.92km(약 21km) 이상 나아가기 힘들었던 이전 여정 기록과 크게 대조된다. 피어리는 극점까지 직선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했지만, 동행했던 헨슨은 얼음 덩어리가 쌓인 '압력 융기'와 얼음 사이가 갈라져 물이 드러난 '리드'를 피하기 위해 자주 우회해야 했다고 증언하여 피어리의 주장과 모순된다. 피어리가 주장한 총 이동 거리(북극점 왕복 133nmi씩, 극점 부근 탐사 38nmi 포함 약 304nmi, 약 563km) 역시 주어진 시간 안에 달성하기에는 비현실적으로 길다는 비판을 받는다.
- 후대 측량 결과: 이후 정밀 측량 결과, 피어리가 북극점이라고 주장하며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긴 지점은 실제 북극점에서 약 6km 떨어진 북위 89도 57분 지점이었음이 밝혀졌다.

이러한 의혹들에 대해 반론과 재평가도 있었다. 1984년, NGS의 의뢰로 피어리의 기록을 재검토한 극지 탐험가 월리 허버트는 피어리가 기록을 위조했으며 북극점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결론 내렸다.[23] 그의 책 ''월계수의 올가미''(The Noose of Laurelseng, 1989)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에 NGS는 1989년, 피어리가 찍은 사진 속 그림자 분석과 수심 측량 기록 검토를 통해 피어리가 북극점 약 8.05km(약 8km) 이내 지점까지는 도달했다고 반박했다.[54][24][55] 그러나 사용된 카메라(코닥)의 정확한 렌즈 초점 거리를 알 수 없어 그림자 분석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었고, NGS는 분석 데이터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 피어리의 측심 기록 역시 깊은 바다에서는 해저에 닿지 않아 정확한 위치 파악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역사가 래리 슈와이카트는 1986년 공개된 피어리의 일기가 일관성이 있으며, 일본 탐험가 우에무라 나오미의 단독 북극점 도달 경험과 유사하다고 주장하며 피어리를 옹호했다.[52] 2005년에는 영국의 탐험가 톰 에이버리가 피어리와 동일한 조건(나무 썰매, 캐나다 에스키모견)으로 탐험을 재현하여 피어리보다 빠른 36일 22시간 만에 북극점에 도달함으로써 피어리의 주장이 불가능하지 않음을 보였다. 하지만 에이버리 팀의 5일간 최고 이동 거리는 90nmi(약 170km)로, 피어리가 주장한 135nmi(약 250km)에는 미치지 못했으며, 귀환은 항공기를 이용해 검증하지 못했다.[57]
결론적으로 로버트 피어리가 인류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했는지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만약 피어리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면, 1926년 리처드 버드의 비행기를 이용한 북극점 왕복 비행이나, 같은 해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레, 링컨 엘즈워스가 비행선 노르게호를 타고 북극해를 횡단하며 북극점 상공을 통과한 것이 최초의 북극점 도달 기록으로 간주될 수 있다. 로알 아문센과 로버트 팰컨 스콧은 남극점 탐험 시 항해 기록을 철저히 남기고 여러 전문가의 검증을 받음으로써 이러한 논란을 피했다.
4. 이누이트와의 관계 및 운철 반출
피어리는 이누이트에 대한 처우로 비판을 받았다. 그는 1891년부터 1897년까지 그린란드 탐험 중 현지 이누이트 여성 Aleqasina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으며[69], 르네 훌란과 라일 딕은 피어리와 그의 대원들이 1908~1909년 탐험에서 이누이트 여성들을 성적으로 착취했다고 보고했다.[40] [41]
피어리는 케이프 요크 운석을 미국으로 반출한 일로 거센 비판을 받았다. 당시 그린란드 이누그후이트 이누이트들은 포경선으로부터 필요한 철을 얻기도 했지만, 철 제련 기술이 없어 도구 제작을 위한 유일한 철 공급원으로 이 거대한 운철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 운석은 지역 경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나, 피어리는 1897년 이 운석을 미국으로 가져가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 4만달러에 판매했다.[42]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서 일하던 인류학자 프란츠 보아스는 피어리에게 연구를 위해 이누이트를 데려오도록 요청했다.[43][44][45] 피어리는 운석을 회수하는 탐험 중 키수크라는 남성과 그의 아들 미닉을 포함한 6명의 이누이트에게, 1년 안에 도구, 무기, 선물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다고 약속하며 함께 미국으로 갈 것을 설득했다.[46] 그러나 피어리는 1897년 운석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이들을 박물관에 남겨두었고, 그들은 고향과 다른 습하고 축축한 환경에서 지내야 했다. 몇 달 안에 4명이 결핵으로 사망했으며, 그들의 시신은 해부되었다. 심지어 키수크의 뼈는 아들 미닉에게 가짜 장례식을 보여준 후 박물관에 전시되었다.[45][44]
십 대 시절 미닉은 ''샌프란시스코 엑스미너''와의 인터뷰에서 피어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처음에는 피어리가 우리 사람들에게 친절했습니다. 그는 장신구, 사냥용 칼과 총, 썰매를 만들 나무를 선물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집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자 다른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우리 눈 앞에서 죽은 친구들과 조상들의 뼈를 챙겼습니다. 여인들의 울음과 남자들의 질문에 그는 죽은 친구들을 따뜻하고 쾌적한 땅에 묻어주기 위해 데려가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불을 지피는 데 필요한 부싯돌과 사냥과 요리에 필요한 철은 거대한 운석에서 공급되었습니다. 피어리는 이것을 그의 증기선에 싣고 필요했던 우리 불쌍한 사람들로부터 가져갔습니다. 그 후 그는 우리 부족의 가장 강한 사냥꾼이자 가장 현명한 지도자였던 나의 아버지와 용감한 남자 나투카를 미국으로 가도록 설득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그들을 보내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피어리는 1년 안에 나투카와 아버지를 데려오고, 그들과 함께 총과 탄약, 나무, 금속, 여자와 아이들을 위한 많은 선물을 가져올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우리는 배의 화물칸에 갇혀 개처럼 취급받았습니다. 피어리는 거의 우리에게 오지 않았습니다.[46]
피어리는 결국 미닉이 1909년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도왔는데, 이는 북극점 도달 후 예상되는 축하 귀환과 관련된 부정적인 언론 보도를 피하기 위한 행동으로 추정된다.[45] 이후 1986년, 작가 켄 하퍼는 미닉에 관한 책 ''내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주세요''를 출간하고, 키수크와 다른 이누이트들의 유해를 그린란드로 반환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을 설득하고 미국과 캐나다 정부의 관료주의를 헤쳐나갔다. 마침내 1993년, 하퍼는 유해 반환에 성공했고[47], 카아나크에서 키수크와 함께 뉴욕으로 옮겨졌던 세 명의 다른 이누이트 [샤먼 아타가나(ca. 1840–1898), 그녀의 남편 누크타크(ca. 1848–1898), 그들의 입양딸 아비아크(ca. 1885–1898)]의 유해에 대한 이누이트식 장례식이 치러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피어리는 10년 이상 이누그후이트를 탐험에 고용하면서 그들에게 서양 상품(무기, 탄약 등)으로 대가를 지불했고, 이는 이누이트들이 서양 물품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1909년 탐험 이후에는 이들을 곤경에 빠뜨렸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미국 탐험대의 식량 요구 등으로 인해 북그린란드의 순록이 거의 멸종될 정도로 남획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48]
5. 말년 및 사망
피어리는 1910년 10월 해군 대령으로 진급했다.[25] 그는 로비를 통해 일부 미국 의원들이 극점 도달에 대한 그의 주장을 다른 탐험가들이 평가하도록 하려는 움직임을 막았다. 결국 극점에 "도달한" 것으로 의회에서 인정받아, 피어리는 1911년 3월 특별 법안에 따라 의회 표창을 받았다.[26] 같은 의회 법안에 따라 피어리는 1909년 4월 6일로 소급하여 해군 토목 공병대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같은 날 해군에서 퇴역하여 메인주 해안의 이글 섬으로 갔고, 그곳은 하프스웰이라는 마을이다. 그곳에 있는 그의 집은 메인 주 역사 유적지로 지정되었다.[27]
퇴역 후, 피어리는 북극 탐험과 발견에 대한 공로로 여러 과학 학회로부터 많은 영예를 받았다. 그는 탐험가 클럽 회장을 두 번 역임했는데, 1909년부터 1911년까지, 그리고 1913년부터 1916년까지였다.
1916년 초, 피어리는 미국 항공 클럽이 설립한 민간 단체인 국가 항공 해안 경비 위원회의 의장이 되었다. 이 위원회는 미국 해안에서 군함과 잠수함을 탐지하기 위해 항공기 사용을 옹호했다.[28] 피어리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하여 군사 및 해군 항공의 사용을 장려했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미국 해군 예비군 항공 해안 경비 부대의 창설로 직접적으로 이어졌다. 전쟁 후 피어리는 8개의 항공 우편 노선 시스템을 제안했고, 이는 미국 우편 서비스의 항공 우편 시스템의 시초가 되었다.[29]
1914년, 피어리는 워싱턴 D.C.의 애덤스 모건 지역에 있는 1831 Wyoming Avenue NW에 있는 집을 구입했고, 1920년 2월 20일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30] 그는 사망 직전인 1920년에 집을 개조하기 시작했고, 이후 조세핀이 개조 작업을 이어받았다. 그녀는 1927년에 집을 팔았고, 1.2만달러의 약속 어음을 받았다.[31]
그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32] 매튜 헨슨은 1988년 4월 6일에 근처에 재안장됨으로써 영예를 얻었다.[33]
6. 유산 및 평가
피어리는 1910년 10월 미국 해군 대령으로 진급했다.[25] 그는 로비를 통해 일부 미국 의원들이 극점 도달에 대한 그의 주장을 다른 탐험가들이 평가하도록 하려는 움직임을 막았다. 결국 극점에 "도달한" 것으로 의회에서 인정받아, 피어리는 1911년 3월 특별 법안에 따라 의회 표창을 받았다.[26] 같은 의회 법안에 따라 피어리는 1909년 4월 6일 자로 소급하여 해군 토목 공병대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같은 날 해군에서 퇴역하여 메인주 해안의 이글 섬으로 갔고, 그곳은 하프스웰이라는 마을이다. 그곳에 있는 그의 집은 메인 주 역사 유적지로 지정되었다.[27]
퇴역 후, 피어리는 북극 탐험과 발견에 대한 공로로 여러 과학 학회로부터 많은 영예를 받았다. 그는 탐험가 클럽 회장을 두 번 역임했는데, 1909년부터 1911년까지, 그리고 1913년부터 1916년까지였다.
1916년 초, 피어리는 미국 항공 클럽이 설립한 민간 단체인 국가 항공 해안 경비 위원회의 의장이 되었다. 이 위원회는 미국 해안에서 군함과 잠수함을 탐지하기 위해 항공기 사용을 옹호했다.[28] 피어리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하여 군사 및 해군 항공의 사용을 장려했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미국 해군 예비군 항공 해안 경비 부대의 창설로 직접적으로 이어졌다. 전쟁 후 피어리는 8개의 항공 우편 노선 시스템을 제안했고, 이는 미국 우편 서비스의 항공 우편 시스템의 시초가 되었다.[29]
1914년, 피어리는 워싱턴 D.C.의 애덤스 모건 지역에 있는 1831 Wyoming Avenue NW에 있는 집을 구입했고, 1920년 2월 20일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30] 그는 사망 직전인 1920년에 집을 개조하기 시작했고, 이후 그의 아내 조세핀이 개조 작업을 이어받았다. 그녀는 1927년에 집을 팔았고, 1.2만달러의 약속 어음을 받았다.[31]
그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32] 그의 탐험 동료였던 매튜 헨슨은 1988년 4월 6일에 피어리 근처에 재안장됨으로써 영예를 얻었다.[33]
피어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여러 장소와 시설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구분 | 명칭 | 비고 |
---|---|---|
해군 함정 | USS 로버트 E. 피어리 | 여러 척의 미국 해군 함정 |
박물관 | 피어리-맥밀란 북극 박물관 | 보든 칼리지, 동료 탐험가 도널드 백스터 맥밀란과 함께 명명 |
학교 | 로버트 E. 피어리 중학교 | 캘리포니아주 가데나 소재 |
학교 | 피어리 직업 기술 학교 | 펜실베이니아주 크레슨 인근, 1972년 개교 |
우표 | 피어리 및 헨슨 기념 우표 | 1986년 미국 우편국 발행 (22센트) [58] |
지명 (그린란드) | 피어리 랜드, 피어리 빙하, 피어리 누나탁, 케이프 피어리 | 그린란드 내 여러 지형 |
지명 (캐나다) | 피어리 만, 피어리 해협 | 캐나다 북극 지역 |
지명 (남극) | 피어리 산 | 남극 대륙 |
달 분화구 | 피어리 | 달의 북극에 위치 [59] |
군사 시설 | 캠프 피어리 | 버지니아주 요크 카운티, 전 해군 시비 훈련 센터, 현 중앙 정보국 훈련 시설 ("The Farm") |
도로 | 피어리 제독 고속도로 | 펜실베이니아주 캄브리아 카운티 미국 22번 국도 일부 |
1881년부터 1884년까지 불운한 레이디 프랭클린 만 원정의 지도자였던 아돌푸스 그리리 소장은 피어리가 용감하게 수백 마일을 육지에서 멀리 여행했고, 그가 극지방에 인접한 지역에 도달했다는 사실에 대해 어떤 북극 전문가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고 초기에 언급했다. 그러나 피어리의 주장이 처음 받아들여진 후, 그리리는 나중에 피어리가 정확히 북위 90도 지점에 도달했는지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극지방 역사가 퍼거스 플레밍은 그의 저서 ''북위 90도''에서 피어리를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추진력이 강하고, 아마도 가장 성공적이며 아마도 극지방 탐험 역사상 가장 불쾌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60]
1932년에는 피어리의 딸인 마리 아니히토 피어리 스태포드가 로버트 바틀렛과 함께 Effie M. Morrissey호를 타고 그린란드 케이프 요크에 피어리 기념비를 세우기 위한 원정을 이끌었다.[61]
=== 북극점 도달 논란 ===
1909년 탐험에서 귀환 후, 피어리의 원래 동료였던 프레데릭 쿠크는 자신이 1908년 4월 21일에 이미 북극점에 도달했다고 주장하며 논란이 시작되었다. 조사위원회가 설치되었지만 결국 쿠크의 주장은 증거 부족으로 기각되었고, 그는 나중에 관련 없는 사기죄로 수감되었다. 이로 인해 피어리가 공식적으로 최초의 북극점 도달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후 피어리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증인을 매수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현재 학계에서는 쿠크가 실제로는 북극점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까지만 도달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피어리의 도달 자체에 대한 의문도 계속 제기되었다. 이후의 상세한 측량 결과, 피어리 일행이 북극점이라고 주장했던 지점은 실제로는 북극점에서 약 6km 떨어진 북위 89도 57분 지점이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전문적인 항법 기술을 가진 사람이 동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귀환 여정이 비정상적으로 순조로웠다는 점 등은 그의 실제 도달 여부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켰다.
만약 피어리가 최초의 북극점 도달자가 아니라면, 1926년 리처드 버드가 비행기를 이용해 북극점 상공을 왕복 비행한 것이나, 같은 해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레, 링컨 엘즈워스가 비행선 노르게 호를 타고 북극해를 횡단하며 북극점 상공을 통과한 것이 최초의 북극점 "도달"로 간주될 수 있다.
7. 수상 및 영예
- 미국 지리학회, 컬럼 지리학상 (1896년)[62]
- 미국 지리학회, 찰스 P. 데일리상 (1902년)[63]
-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 허버드 메달 (1906년)[64]
- 런던 왕립 지리학회, 특별 대 금메달
- 워싱턴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 특별 대 금메달
- 필라델피아 지리학회, 대 금메달
- 시카고 지리학회, 헬렌 컬버 메달
- 독일 제국 지리학회, 나흐티갈 금메달
- 이탈리아 왕립 지리학회, 험버트 왕 금메달
- 오스트리아 제국 지리학회 훈장
- 헝가리 지리학회 금메달
- 벨기에 왕립 지리학회 금메달
- 앤트워프 왕립 지리학회 금메달
- 스페인 원정 훈장
- 1898년 그린란드 탐험의 공적으로 왕립지리학회로부터 금메달(후원자 메달)을 받음[69]
- 보든 칼리지 – 명예 법학 박사 학위
- 에든버러 대학교 – 명예 법학 박사 학위
- 뉴욕 상공 회의소 명예 회원
- 펜실베이니아 협회 명예 회원
- 맨체스터 지리학회 명예 회원
-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왕립 지리학회 명예 회원[65]
- 스코틀랜드 왕립 지리학회, 특별 트로피 (허드슨, 배핀, 데이비스가 사용한 선박의 은제 복제품) 수여
- 1913년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그랑 오피시에 수훈[66]
- 1922년 4월 6일,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로버트 에드윈 피어리 제독 기념비가 그의 딸 마리 피어리 스태포드에 의해 공개됨. 이 행사에는 워런 G. 하딩 대통령과 전 미국 해군부 장관 에드윈 덴비를 포함한 다수의 정부 관료들이 참석함.[67]
- 1986년 5월 28일, 미국 우정청은 피어리와 매튜 헨슨을 기리는 22센트 우표를 발행함.[58]
8. 대중문화
닐 문로는 1909년 10월 4일 처음 출판된 그의 에르치 맥퍼슨 이야기 "에르치가 극지 상황을 설명하다"에서 피어리와 쿡의 경쟁 주장에 대한 풍자적인 설명을 제공한다.[68]
참조
[1]
웹사이트
Rear Admiral Robert E. Peary, US Navy 1856–1920
https://www.history.[...]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2]
웹사이트
Robert E. Peary
https://www.bowdoin.[...]
Bowdoin College
[3]
서적
[4]
웹사이트
Jockey Cap – Maine Trail Finder
https://www.mainetra[...]
Maine Trail Finder
[5]
서적
[6]
서적
[7]
서적
How to Climb Mt. Blanc in a Skirt: A Handbook for the Lady Adventurer
https://books.google[...]
Palgrave Macmillan
[8]
서적
My Arctic Journal: A Year among Ice-fields and Eskimos
https://archive.org/[...]
Longmans Green
[9]
웹사이트
List of famous freemasons
http://freemasonry.b[...]
[10]
웹사이트
Famous Freemasons in the course of history
https://stjohnslodge[...]
St. John's Lodge, Washington, D.C.
[11]
간행물
The Progress of Discovery and Exploration Within the Arctic Region
[12]
서적
Bartlett: The Great Explorer
https://books.google[...]
Doubleday Canada
[13]
문서
Register of Commissioned Officers of the United States Navy. Editions of 1902 and 1903.
[14]
뉴스
Peary Gets $50,000; M.K. Jesup Gives $25,000
https://www.nytimes.[...]
1905-07-13
[15]
웹사이트
Robert Edwin Peary
https://collections.[...]
Dartmouth College
[16]
문서
Nearest the Pole
[17]
웹사이트
Contributions Dennis Rawlins 2
http://www.dioi.org/[...]
The International Journal of Scientific History
[18]
서적
The North Pole: Its Discovery in 1906 Under the Auspices of the Peary Arctic Club
Dover Publications, Inc.
1986
[19]
서적
A Negro Explorer at the North Pole
https://books.google[...]
Dodo Press
1912
[20]
웹사이트
Profile: African-American North Pole Explorer Matthew Henson
https://www.national[...]
National Geographic
2003-01-10
[21]
웹사이트
Did You Know... A Customs Employee was the 'First Man to Sit on Top of the World?'
https://www.cbp.gov/[...]
U.S. Customs and Border Protection
[22]
간행물
Who Discovered the North Pole?
https://www.smithson[...]
2009-04
[23]
뉴스
Doubts cast on Peary's claim to Pole
https://timesmachine[...]
1988-08-22
[24]
뉴스
Who Was First at the North Pole?
https://tierneylab.b[...]
2009-09-07
[25]
웹사이트
Robert Edwin Peary
https://www.history.[...]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26]
웹사이트
Peary at the North pole
https://www.navalhis[...]
United States Naval Institute
2013-01-18
[27]
뉴스
North Pole explorer's Maine home nominated as National Historic Landmark
https://bangordailyn[...]
2013-12-09
[28]
서적
Origins of Navy Patrol Aviation, 1911 to 1920s
https://www.history.[...]
[29]
웹사이트
Guide to the Frederick A. Cook and Robert E. Peary Collection MSS.2017.07.14
https://oac.cdlib.or[...]
Santa Clara University
[30]
뉴스
Washington's present meets the past in Adams-Morgan NEIGHBORHOOD TOUR
https://www.baltimor[...]
1995-06-25
[31]
웹사이트
Architectural drawing for alterations to a row house ("residence") for Josephine D. Peary (originally for Adm. Robert E. Peary), 1831 Wyoming Avenue, N.W., Washington, D.C.
https://www.loc.gov/[...]
Library of Congress
[32]
웹사이트
Robert Peary
https://www.arlingto[...]
Arlington National Cemetery
[33]
웹사이트
Matthew Alexander Henson
https://www.arlingto[...]
Arlington National Cemetery
[34]
웹사이트
The Forgotten Indigenous Women of Robert Peary's Arctic Expeditions
https://arcticportal[...]
Arctic Portal
2017-08-10
[35]
서적
Exploring the North Pole: The Story of Robert Edwin Peary and Matthew Henson
https://archive.org/[...]
Mitchell Lane Publishers
2005
[36]
서적
The Noose of Laurels
https://archive.org/[...]
Atheneum
1989
[37]
뉴스
US explorers' Inuit kin plug into globalized world
https://nativetimes.[...]
2011-09-07
[38]
뉴스
Anaukaq Henson, 80, dies
https://www.washingt[...]
1987-07-13
[39]
뉴스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a giant; Matthew Henson's descendants honour their ancestor
http://nunatsiaq.com[...]
2009-04-09
[40]
간행물
Alnayah's People: Archival Photographs from West Greenland, 1908–1909
2023
[41]
간행물
'"Pibloktoq"(Arctic Hysteria): A Construction of European-Inuit Relations?'
https://www.jstor.or[...]
1995
[42]
웹사이트
The Legacy of Arctic Explorer Matthew Henson
https://www.national[...]
2014-02-28
[43]
서적
Skull Wars: Kennewick Man, Archaeology, and the Battle for Native American Identity
https://books.google[...]
Basic Books
2000-03-14
[44]
서적
Give Me My Father's Body: The Life of Minik, the New York Eskimo'
https://books.google[...]
Washington Square Press
[45]
웹사이트
Minik and the Meteor
https://narratively.[...]
2013-03-19
[46]
서적
Northern Voices: Inuit Writing in English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92-01
[47]
간행물
The Minik Affair: The Role of the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https://doi.org/10.1[...]
2002-01-01
[48]
간행물
The Muskox Patrol: High Arctic Sovereignty Revisited
https://journalhosti[...]
2003-03
[49]
뉴스
A Correction
https://www.nytimes.[...]
2024-02-24
[50]
뉴스
Nations Hail Peary as Pole Discoverer
https://www.nytimes.[...]
1909-12-16
[51]
문서
Herbert, 1989; Rawlins, Contributions
http://www.dioi.org/[...]
[52]
간행물
Polar Revisionism and the Peary Claim: The Diary of Robert E. Peary
https://www.jstor.or[...]
1986-05
[53]
뉴스
NOT QUITE ON TOP OF THE WORLD
https://www.nytimes.[...]
1989-08-13
[54]
뉴스
Peary Made It to the Pole After All, Study Concludes
https://www.nytimes.[...]
1989-08-13
[55]
뉴스
PEARY'S POLAR MYSTERY
https://www.washingt[...]
1991-06-09
[56]
웹사이트
Proof Henson & Peary reached Pole (1909 Depth Soundings)
https://matthewhenso[...]
Matthew Henson
2022-08-16
[57]
뉴스
Interview: Tom Avery, polar explorer
https://www.countryl[...]
2009-04-30
[58]
웹사이트
Exploration: Matthew Henson
https://postalmuseum[...]
National Postal Museum
[59]
웹사이트
Planetary Names: Crater, craters: Peary on Moon
https://planetarynam[...]
United States Geological Survey
[60]
뉴스
The race to the North Pole and a controversy that has yet to thaw
https://www.theneweu[...]
2020-12-19
[61]
웹사이트
Peary-MacMillan Arctic Museum, Exhibition: Building the Peary Monument
https://www.bowdoin.[...]
Bowdoin College
[62]
웹사이트
CULLUM GEOGRAPHICAL MEDAL
https://americangeo.[...]
American Geographical Society
[63]
웹사이트
CHARLES P. DALY MEDAL
https://americangeo.[...]
American Geographical Society
[64]
웹사이트
HUBBARD MEDAL
https://www.national[...]
National Geographic
[65]
서적
The North Pole: its discovery in 1909 under the auspices of the Peary Arctic club
https://books.google[...]
Frederick A. Stokes
[66]
간행물
Memoir of Robert Edwin Peary
https://www.jstor.or[...]
[67]
뉴스
Dignitaries of the Nation Brave Rain to Honor Peary
https://chroniclinga[...]
1922-04-07
[68]
문서
Munro, Neil, "Erchie Explains the Polar Situation", in Osborne, Brian D. & Armstrong, Ronald (eds.) (2002), Erchie, My Droll Friend, Birlinn Limited, Edinburgh, pp. 379 -382, ISBN 9781841582023
[69]
웹사이트
Medals and Awards, Gold Medal Recipients
http://www.rgs.org/N[...]
Royal Geographical Society
2016-11-2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